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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하수도 입구를 열어 찬찬히 주위를 살핀 카가미는 천천히 사다리를 마저 올라 하수도를 빠져나왔다. 혹여 시체가 되살아날 것은 우려해 남은 것까지 모두 쓸어간 모양인지 거리는 여느 때보다도 깨끗했다. 도로에 흩뿌려진 핏물이나 부서진 자동차나 건물들의 잔해들이 없었었더라면 정말로 그간의 일이 꿈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카가미는 짧게 생각했다. 꿈같은 나날이다. 카가미는 되먹지도 않은 농담을 기억해냈다. 아마 그것을 말해준 이는 진즉에 죽었거나 감염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정적에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긴장을 풀려 애썼다. 팔을 돌려 뻣뻣하게 굳은 어깨의 근육을 진정시켜보아도 심리적인 안정감과 같은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괜한 노력임을 깨달은 카가미는 과장해서 숨을 뱉고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그의 버릇이었다. 겨우 한 달 남짓 되는 짧은 시간에 몸에 익힌 긴장감은 그림자마냥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당연한 거겠지. 그는 두 손 가득 쥐고 있는 불안을 외면했다. 아무리 군대가 다녀갔다고 해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감염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았던 곳을 다시 확인했으나 기척은 없었다. 도시에 찾아온 오랜만의 정적이었다.

카가미군! 무슨 일 있는 겁니까?”

하수도 아래에서 쿠로코가 소리쳤다. 그제야 아래에 두고 온 쿠로코가 생각나 하수도 입구를 내려다본 카가미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쿠로코는 이미 사다리를 반쯤 올라와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좀처럼 약속을 지킬 줄 몰랐다. 자꾸 어길 거면 뭐 하러 신호를 만든 거냐며 나무랄까 생각도 했으나 그 대신에 카가미는 거의 다 올라온 쿠로코의 손을 낚아채 위로 끌어당겼다. 계속 어두운 곳에 있었으니 햇빛이 그리웠겠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카가미는 오늘만큼은 잔소리를 접어두고 쿠로코의 고집에 어울리기로 했다. 적어도 이곳만큼은 안전하니까. 그간 쿠로코에게 과하게 엄격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 탓도 있었다. 카가미에게 반쯤 끌리다시피 하수도를 벗어난 쿠로코는 팔이 당겨 아팠던 모양인지 한두 차례 팔을 돌리며 굳은 어깨를 풀었다. 넌 늘 막무가내예요. 말과 다르게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휴식시간에 쿠로코도 들떠 있음을 카가미는 쉽게 눈치 챘다. 가면을 쓴 듯 변화를 보여주지 않던 쿠로코의 얼굴 근육이 이제야 제 일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받는 햇살이 따뜻한 탓이다. 조금 길어진 앞머리를 오른손으로 대충 뒤로 넘기며 그는 쿠로코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이틀 동안 카가미와 쿠로코는 지하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전의 생활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식량을 구하러 가거나 불을 피울만한 것을 찾아서 카가미만은 자주 움직여 왔기에 정말로 어디에도 나가지 않은 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리 구해둔 라이터와 장작으로 페인트 통에 불을 피웠고, 이제는 주인이 없는 식료품점에서 구한 통조림 따위를 까먹으며 시간을 보냈더니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해가 없는 생활이 익숙지 않은 탓이라고 카가미는 장작불 가까이에 붙어 몸을 녹이고 있던 쿠로코에게 변명했었다. 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변명하고 눈을 돌릴 일이 늘어만 갔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함을 알고 있기에 카가미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서 다행이다. 카가미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간만에 텐션이 오른 쿠로코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는 대신에 그는 볕을 쬐지 못해 전보다도 창백해진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을 아래에서 생활한 탓에 쿠로코는 눈에 띄게 희어졌고 하늘을 담아 놓은 듯 보이는 눈동자와 머리색만이 더욱 도드라졌다. 옅은 빛이었던 눈동자가 선명해진 것 같다는 착각까지 일었다. 몸에 있는 모든 색소를 가져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져서 하늘에 가까워지는 눈동자. 잠깐 상상해보았지만 역시나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카가미가 헛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하늘에 떠다니는 옅은 구름 따위를 지켜보던 쿠로코의 시선이 어느새 그를 향해 있었다. 올곧게 눈앞을 비추는 눈동자를 바로 직시할 수가 없어 카가미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회색빛으로 바래버린 낡은 농구화가 눈에 들어왔다. 근처에서 신발가게를 찾아봐야겠다. 그는 머릿속에 앞으로의 소망 따위를 늘어놓았다. 작은 발은 두어 걸음의 간격을 유지한 채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요.”

앞으로의 계획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쿠로코가 먼저 물음을 띄웠다. 답을 요구하기보다는 그저 생각났기에 말해본다는 투였다. 감염자들이 나타난 뒤로 쿠로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카가미는 알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마냥 쿠로코는 담담했고 단조로웠다. 분명 예전에는 좀 더 알기 쉬운 녀석이었는데, 하고 카가미가 짧게 따뜻했던 시절을 추억했다. 쿠로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의 그는 이제 눈치 챌 수 없어졌다. 괜찮을 거야. 그는 앞으로 걸어가 쿠로코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말과 달리 손은 자꾸만 떨렸다.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손을 잡으면 손바닥에 온기가 돌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 말이다.

카가미는 쿠로코의 손을 붙잡은 채 엄지로 쿠로코의 손등을 훑었다. 기억하던 것보다도 더 거칠어져 있었다. 농구로 단련되어 있던 손은 어느새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나 딱지가 지고 떼어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카가미도 마찬가지였기에 손과 손을 맞잡을 때마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했다. 익숙하지 않던 것을 쥐어서 생겨난 흉터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가까운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자꾸만 변해가는 듯했다.

이상하네.”

조금 우울한 톤으로 카가미가 말했다.

그러게요.”

쿠로코가 대답했다. 조금은 장난스럽고 밝은 톤이어서 카가미는 금세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간의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쿠로코 쪽에서 먼저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고 미워해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쿠로코가 곁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 하나면 된다고 카가미는 쿠로코의 손을 당겨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입술에 닿는 거칠고 투박한 피부의 느낌에 작은 한숨을 쉬고 혀를 내밀어 거친 표면을 가볍게 핥았다. 혀에 남는 것은 짠맛이었다. 땀이 밴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행위에 조금 놀란 쿠로코가 손을 뒤로 뺐다가 곧 볼을 잡아 당겼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쿠로코에게 볼을 꼬집히며 카가미가 반쯤은 뭉개진 소리로 변명했다. 그는 이런 시간들이 좋았다. 장난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순간들을 그는 좋아했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쿠로코에게 잡혀 있는 볼이 따뜻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

 

 

 

출국을 앞두자 시간은 정말로 빠르게 흘러갔다.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아볼라치면 주위는 빠르게 바뀌어갔고 농구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세이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있는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카가미는 나름대로 더 열심히 코트 위를 달렸다. 모두와 함께 코트에 뛰고 싶다는 미련과 그럼에도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부딪히는 순간마다 그는 도움닫기를 하는 다리에 크게 힘을 실었다. 이 순간순간에 충실하자. 카가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코트를 가로질렀다. 코트에 함께 있는 순간들을 허투루 내버릴 수 없었다. 그 의지만큼이나 그곳에 남을 수 있는 기간도 빠르게 줄어드는 것만 같다고 그때의 그는 생각했었다. 애정을 갖고,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순간부터 체감하는 시간이 전과는 달라졌다. 하루가 이리도 짧다는 사실을 카가미는 세삼 깨달았다. 함께하는 시간을 좀 더 만들어야했다는 생각도 그때서야 들었다. 손아귀에 남은 시간이 고작 일주일뿐이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힘든 연습을 마치고 마지바에 들렀다. 카가미는 치즈버거 스무 개와 콜라를 주문했고, 직원이 알아차려주지 않아서 카운터에 한참을 서 있는 쿠로코를 흘깃 보고는 바닐라셰이크 중간 사이즈를 추가로 주문했다. 평소와 같이 마주 앉아 드문드문 대화를 하며 간식-카가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을 먹었다. 먼저 셰이크를 비운 쿠로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카가미는 치즈버거를 열심히 씹어 삼켰다. 조용하고 평범하고 단조로운 하루였다. 마지바를 나와 함께 길을 걸었고 갈림길에 서서 짧은 인사를 나눴다. 카가미는 집으로 향하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뒷모습이 흐려져 보였다. 그래서 붙잡았을 것이다. 세상이 물에 젖은 그림 마냥 녹아가고 흐려지는 것 같아서 쿠로코를 불러 세웠던 것이라고 카가미는 변명하고 싶었다. 크게 이름을 부른 뒤에 쿠로코를 쫓아가 한 손을 낚아채 꽉 잡았었다. 우리 집에 가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급히 뱉어버린 말이 어쩐지 이상해서 카가미는 입을 벌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쿠로코는 잡힌 손을 흘깃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카가미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민을 하는 듯해서 카가미는 괜히 말을 꺼낸 것만 같아 잠시의 충동에 밀려버린 자신을 탓했다. 그래요. 평소와 같은 냉랭한 표정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쿠로코가 웃으며 그럴까요, 하고 가볍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맞추어 쿠로코와 나란히 걸었고, 농구나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고 카가미는 회상했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기억들은 자꾸만 흐려져 가고 있었다.

집에 있는 것들로 가볍게 저녁을 먹었고 소파에 앉아 간식으로 사둔 과자를 뜯었었다. 나란히 앉아 보내는 시간은 무료하고 조용했으나 이상하게 따뜻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이다. 유독 감상에 젖은 날이어서 쿠로코에게 조금 기대었다. 작은 어깨에 머리를 대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했었다. 쿠로코는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고 어정쩡하게 카가미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있다가 곧 두 팔로 그를 슬며시 껴안았다. 카가미는 허리를 숙인 채 작은 팔에 안겨 있었다. 작고 선명한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가슴이 뛰는 소리였다. 다시 올 거야. 박자를 갖춘 그 소리에 자극을 받은 카가미는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고 쿠로코를 마주보았다. 다녀올게. 소파에 놓여 있는 쿠로코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나름대로 자신 있게 보이고 싶어서 애쓰고 있었다. 그 때 쿠로코는 뭐라고 말했더라. 카가미는 열심히 그 날을 되짚어 보았지만 이상하게 쿠로코의 대답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 아래에 가라앉아버린 것 같았다.

거리가 감염체들로 가득해지는 것에 걸린 시간은 겨우 이틀 남짓이었다. 단 시간에 도시는 마비되었고 그것이 전체로 이어지는 것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텔레비전 통신이 끊긴 것은 감염체가 나타났다는 속보가 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다른 곳으로 쿠로코와 함께 이동하자고 결심을 했을 때이기도 했다. 좀 더 안전한 곳을 찾고 싶었다. 지도와 식료품, 혹시 모를 때를 위한 도구들을 챙겨야 했던 탓에 그 뒤로도 며칠이 지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숨을 죽이고 이동하는 상황에서 카가미가 제일 우선시 한 것은 쿠로코였다. 그는 쿠로코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나를 버려도 좋아요.’

사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처해 있는 상황은 점차 어려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자꾸만 늘어갔다. 한 때는 사람이었을 감염체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내리쳤던 날, 카가미는 하루 종일 헛구역질을 했다. 한 번으로는 죽질 않아서 온힘을 다 해서 몇 번이나 내리쳐야했고 두개골이 깨져서 그 안의 썩어버린 뇌수-카가미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드러나고 그것들이 뭉개질 때까지 카가미는 쇠파이프를 꽉 쥐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감염체의 얼굴은 반쯤 뭉개져서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카가미는 쇠파이프를 그대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위험이 되니까 죽였을 뿐이다. 뭉개진 눈알에서 느껴지는 원망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속으로 변명했다. 사람을 죽인 것만 같았다. 곁에 있던 쿠로코가 가게 안을 굴러다니는 통조림 따위를 침착하게 주워 가방에 챙기는 동안 카가미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쿠로코가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버려도 괜찮아요. 담담하고 단조로운 톤이어서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카가미는 고개를 들고 쿠로코를 바라봤다. 각오가 되어 있다는 얼굴이었다. 쿠로코는 늘 진지했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는 고개를 젓고 쿠로코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임시로 정한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맞잡은 손이 유난히 뜨거웠던 것 같다고 카가미는 거칠어진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바보. 카가미는 마른세수를 하고 곁에 기대어 있는 쿠로코에게 시선을 옮겼다. 적어도 이 근방에는 감염체들이 없음을 확인한 쿠로코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소리에 예민한 쿠로코는 작은 기척에도 금세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그 덕에 아주 얕은 잠조차도 나누어서 잘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쿠로코가 흘러가듯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카가미는 쿠로코가 반대편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죽고 싶지 않아하는 주제에 버리라는 말은 정말로 쉽게 해버리는 쿠로코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카가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쿠로코의 숨소리에 맞춰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군대가 지나간 도시들을 차차 뒤따라서 다닌다면 좀 더 안전하게 물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감염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정말로 한 곳에 정착해도 괜찮을지도 몰랐다. 안전한 곳에서 함께 살아가자. 쿠로코가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세상은 조용하게 어둠에 잠겨 가고 있었다.

 

 

 

딱 맞는 운동화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 신발가게에 들어서며 카가미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걸까 고민했다. 이미 발에 맞는 운동화를 찾아낸 쿠로코에게 조금 미안해진 탓이었다. 낡은 농구화를 작은 가방에 기어코 구겨 넣은 쿠로코는 그전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첫 번째로 들린 신발가게의 창고에서 적당한 것을 찾아낸 카가미가 의자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쿠로코를 앉힌 뒤에 제 손으로 신겨준 것이었다. 쿠로코의 발을 내려다보며 카가미는 조심하라며 나름대로 다정한 손길로 쿠로코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간의 소동 탓에 유리문이 깨져 곳곳에 유리파편이 흩뿌려진 탓에 자칫하면 유리조각이 박히기 십상이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안 되겠어요.”

전시되어 있는 신발들을 둘러보던 쿠로코가 회색빛으로 바란 농구화 한 짝을 내밀었다. 카가미가 평소에 신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붉은색 농구화였다. 유리조각들이 신발 안까지 들어갔는지 빛을 받은 깔창이 반짝거렸다. 작게 한숨을 쉰 카가미는 받아든 농구화를 근처에 대충 던져버렸다. 전시품 중에서는 신을 만한 게 없는 듯 보였다.

포기하자. 괜찮은 걸 찾다가는 하루가 다 가겠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카가미가 쿠로코를 불러 세웠다. 쿠로코는 좀 더 찾아볼 모양인지 신발이 전시 되어 있는 선반에 가방을 내려두고 쌓여 있는 신발상자들을 하나씩 열어보고 있었다.

그걸 계속 신고 다닐 수도 없잖아요.”

신발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고 뒤로 던지기를 반복하며 쿠로코가 눈짓으로 카가미가 신고 있는 신발을 가리켰다. 카가미는 쿠로코의 시선을 따라 눈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과 검은색 선으로 꾸며져 있는 그의 신발은 반쯤 뜯겨져서 조금만 더 있으면 밑창까지 뜯겨져나갈 듯 보였다. 그거로는 더 못 걸어요. 당돌하게 단정지어버린 쿠로코를 카가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쿠로코의 관심은 온통 신발상자에 가 있었다. 한 번 단정지어버리면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을 카가미는 알고 있었다. 그간의 함께한 시간 덕분이었다. 고집에 어울려줄 수밖에 없는 노릇임을 깨달은 카가미는 그만두자는 말 대신에 찾아보지 않은 창고를 좀 더 뒤져보기로 했다. 유리문이 깨지기는 했지만 대충 보아서는 누군가가 헤집어간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창고에는 괜찮은 물건이 남아 있을 듯싶었다. 어차피 생존자는 거의 없을 테니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간의 경험으로 배웠기에 나오는 확신이었다. 혼란스러운 나라에 생존자는 극히 적었고 그마저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진짜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도 벌써 몇 주 전이었다. 가게와 연결되어 있는 창고의 문을 찾아 문고리를 가볍게 돌리며 카가미는 가볍게 추측했다. 앞으로도 계속 둘만 있는 생활이 지속될 것이라는 간단한 결론이 지어졌다.

전기가 끊긴 탓에 스위치를 눌러도 전등은 켜지지 않았다. 손을 뒤로 뻗어 가방에 달아둔 손전등을 가까스로 잡은 카가미는 손전등의 전원을 켜고 주위를 비추어보았다. 작은 신발가게에 딸린 곳답게 창문도 없는 작은 방이라는 느낌의 창고였다. 일렬로 줄지어 있는 선반에 차곡차곡 정리 되어 있는 상자들을 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지도 조금 지난 듯 했다. 상자에도 바닥에도 뿌연 먼지가 쌓여 먼지 냄새가 났다. 적어도 그 한 달간은 누구도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가미는 손전등을 꽉 쥐며 한 발씩 보폭을 작게 해서 앞으로 걸었다. 한참 바깥에서 신발상자들을 확인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던 쿠로코도 어느새 뒤로 따라붙어 있었다.

그래도 여긴 많이 남아 있네.”

다들 떠났으니까요. 카가미 군에게 맞는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좋을 텐데. 카가미는 말끝을 흐리며 손전등으로 발밑을 비췄다. 희미한 얼룩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 되어서 색이 짙어지긴 했지만 분명한 핏자국이었다. 바닥에 있는 얼룩의 정체가 피라는 사실을 인지한 카가미는 그대로 멈춰 섰다. 뒤에서 따라오던 쿠로코가 가방에 부딪혀서 작게 신음을 냈으나 살피지 않고 그대로 얼룩을 따라 바닥을 훑었다. 나가던 자국인지 들어가던 자국인지 확신할 수 없는 탓이었다. 피를 흘렸다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을 거다. 감염이 되었다면 그대로 이곳에 갇혀 있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손전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카가미는 나름대로 빨리 머리를 굴려보려 노력했다. 천장에 연결 되어 있는 선반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탓에 힘을 주어도 쓰러지지 않을 테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너무도 작았다. 흔적을 발견해버렸으니 가능한 빨리 위험이 될 만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답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쿠로코도 함께이니까. 입술을 꾹 깨물며 손전등을 쥐지 않은 손을 뒤로 뻗은 카가미는 재빨리 쿠로코의 손을 붙잡았다.

포기하자.”

?”

여긴 없는 것 같아.”

갑작스러운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다시금 이름을 부르는 쿠로코를 카가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 쿠로코가 손을 빼낼까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핏자국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혹시, 있다면. 적어도 쿠로코는 내보내고 혼자서 살펴야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쿠로코가 눈치 챈다면 결코 얌전히 말을 따라주지 않을 테니 그는 쿠로코가 자국을 보지 못하도록 손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가 멘 가방에 얼굴을 박고 있는 꼴이 되어버린 쿠로코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옆구리를 때려오기는 했으나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카가미 군. 쿠로코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왔다. 카가미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주춤주춤 천천히 뒤로 걸었다. 쿠로코가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도록 밀어낸 카가미는 그제야 뒤로 돌아서서 쿠로코를 쳐다봤다. 나가자. 단호한 카가미의 태도에 쿠로코는 잠시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대답 없이 문턱을 넘어 창고 밖으로 나갔다. 카가미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간 뒤 천천히 문을 닫았다. 무엇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감염체라면 문을 잠그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가미는 그대로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쿠로코와 함께 밖에서 행동하는 일이 드물다보니 이런 긴장감이 적응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활동은 혼자서 해왔고 쿠로코에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바깥-대체로 그들이 약속한 휴식처가 아닌 곳을 말했다-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왔으나 쿠로코는 그 위험을 혼자 감수하려는 그에게 자주 의문을 제기했다. 애완동물. 언쟁이 지나치게 났던 날에 쿠로코가 빗댄 표현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부실에 두고 온 쿠로코를 닮은 강아지가 생각났던 탓이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대도 꼬리를 흔들며 쫓아오던 작은 강아지가 눈에 밟혔다. 카가미가 다른 생각에 잡혀 있던 사이에 쿠로코는 기운이 빠졌는지 금세 얌전해졌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힘없이 웃은 카가미는 평화로웠던 때의 쿠로코를 떠올려보았다. 칼로 긁어낸 것 마냥 표정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카가미 군.”

쿠로코가 카가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까의 사태를 정말로 모른다는 눈치여서 카가미는 내심 안심하며 그대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찾았어요.”

무얼 찾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카가미는 고개를 들고 쿠로코를 올려다보았다. 쿠로코의 손에는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딱 맞을 것 같아서 아까 집어왔어요. 카가미의 등 뒤로 있는 창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쿠로코가 가볍게 말했다. 그 정신없는 틈에 언제 신발을 찾아낸 것인지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역시 긴장감이라고는 없구나, 하는 허탈감이 겹쳐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카가미는 애써 감정들을 털어냈다.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쿠로코에게서 신발상자를 받아든 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종이들을 대충 꺼내 바닥에 버렸다. 검정과 붉은색이 적절하게 조합된 운동화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깨끗한 탁자에 몸을 기대어 신고 있던 낡은 운동화를 벗고 새 운동화를 신은 카가미는 잠시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해보다가 고개를 숙여 신발을 확인했다. 사이즈도 괜찮았고 나름대로 편안했으니 이대로 다시 걸어갈 수 있을 듯싶었다. 신발을 찾았으니 이제 식량과 소모품들을 대충 구해서 다시 짐을 챙겨 군대의 뒤를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고마워. 곧 어두워질 시간이라 다시 임시로 정해둔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카가미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쿠로코에게 인사를 건넸다. 잠시 말이 없던 쿠로코는 이내 별거 아닌걸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도 고마워. 카가미가 덧붙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모처럼 쿠로코 쪽에서 먼저 손을 잡아왔다. 카가미는 쿠로코가 내민 손을 슬며시 잡은 채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돌아가는 길이 이상하게 더 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걸어서 그럴 것이다. 천천히 호흡하며 카가미는 긴장들을 길 위에 내버려두었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물집이 생기고, 터지고, 다시 살이 차기를 반복하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박였다. 손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쪽 하나 성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모처럼 내려둔 카가미는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금세 더러워져버린 집을 깨끗이 치웠다. 전기는 여전히 끊겨 있는 탓에 손으로 이불과 침대커버를 빨았고 걸레로 먼지 쌓인 바닥과 물건들을 몇 번이나 닦았다. 정말로 일상에 돌아온 것만 같다고 그는 바삐 손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지만 어쩐지 마음은 여느 때보다도 더 평온했다.

군대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결국 출발지였던 도쿄였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멀리 갔던 것도 아니었으니 잠시 여행을 다녀왔던 정도가 아니었을까하고 익숙한 건물들을 눈으로 훑으며 카가미는 짐작했었다. 감염체들이 나타나고 두어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방송은 중지되지 않은, 발신지가 불명확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제 감염체는 거의 처리 되었다고 공표했다. 가벼운 충격으로는 죽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탐욕스럽게 뜯어 삼키고 정상적이었던 생명체를 다시금 감염시키는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렸다고 했다. 이제 생존한 사람들은 다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우리는 그럴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는 단호하고 냉정했다. 군인들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닐까 짐작은 해보았으나 확실히 알기는 어려웠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방송을 들으며 그는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쿠로코를 주시하고 있었다. 쿠로코의 시선은 조금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잡음이 섞인 목소리는 여전히 크게 떠들고 있었고 그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아버렸다. 앞으로는 정말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확신할 수 없는 문제 앞에 그들은 말없이 놓여 있었다. 그 아득한 기로 앞에서 먼저 목소리를 내고 돌아가자고 말한 쪽은 쿠로코였다. 집에 가요. 그간의 일로 많이 지쳐 있는 쿠로코는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카가미는 오랜만에 쿠로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러자. 살아남기 위해서, 쿠로코를 살리기 위해서 애써 보려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쿠로코도, 카가미 본인도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다. 무심하고 차갑게 그렇게 말했던 쿠로코의 표정은 목소리와 다르게 무척 슬퍼보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걸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모처럼 앞서 나가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가미는 생각했었다. 떠올려보면 고백도, 감정을 나누는 것도, 무엇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여버린 감정은 이제 부스러져서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어져버렸다. 한참을 걷자 익숙했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다녔던 학교였다. 그간의 시간을 알려주듯 교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대충 보았을 때 학교 건물도 여기저기에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카가미는 쿠로코와 함께 충동적으로 체육관에 들렸다. 굳게 닫혀 있던 덕분인지 체육관 안은 깨끗했고 먼지가 조금 쌓여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열면 달려올 것만 같았던 2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잘 도망쳤으리라는 변명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죄책감에 한참을 체육관에 서 있다가 습관처럼 농구공을 찾았다. 카가미는 체육관에 있는 체육 도구실에서 찾은 농구공을 가볍게 튕겨보다가 이내 골대를 향해 던져보기도 했다. 쿠로코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농구공의 감촉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어서 조금 우울해졌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한참을 각자 공을 하나씩 들고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패스를 해보았다. 쿠로코가 던져준 공을 그대로 공중에서 받아 골대에 내리꽂는 간단한 동작이었다. 그 간단하고 단조로운 동작에 가슴 한 구석이 바늘에 찔린 듯 따끔해졌다. 이것이 그리웠던 거라고 카가미는 짐작했다. 쿠로코는 간만에 만져보는 공이 조금 어색한지 한두 차례 손을 털며 감각을 되새기다가 이내 예전처럼 정확하게 공을 보내주었다.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쿠로코인데도 이상하게 공을 보내줄 위치만은 짐작을 할 수 있어서 카가미는 속으로 실소했다. 둘은 한참을 뛰었고 지쳐서 체육관에서 쓰러질 때까지 달렸다. 먼저 쓰러진 쪽은 역시 쿠로코였고 카가미는 그 뒤로 한참을 달리고서야 그 옆에 드러누웠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말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린 둘은 한참을 한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대로 잠이 들어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 그 간격 그대로 체육관 중앙에 몸을 뉘인 채 시간을 보냈다. 일정한 박자로 들리는 숨소리만이 그 간격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눈을 뜨고는 다시 들어올 때 그랬듯이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집으로 가보겠다는 쿠로코를 카가미는 따라나서지 않았고, 쿠로코도 함께 가보겠냐고 권유하지 않았다. 카가미는 갈림길에서 멀어지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서 있다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누구도 없을 줄을 알면서도 집으로 향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발이 그대로 움직여서 갔을 뿐이다. 늘 그래왔듯이 앞으로 발을 기계적으로 옮기며 카가미는 긴 숨을 뱉었다. 현관문 앞까지 도착해서 열쇠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는 한참을 서 있다가 시험 삼아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열고 나갔던 모양인지 현관문은 쉽게 열렸고 익숙한 현관이 보였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가자 단조롭고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는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고 따뜻하다거나 돌아와서 행복하다거나 하는 벅찬 감정조차도 일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일상이었다.

청소를 모두 끝내도 시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쿠로코를 찾으러 가보아야 할까 널어둔 빨래들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카가미는 소파에 앉은 채 그대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찾아간다고 기뻐해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버려달라던 쿠로코의 말이 사실은 그저 함께 하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이제야 추측되기도 한 탓이었다. 정적이 그림자처럼 깔린 집안은 조용하고 조금 무서워서 카가미는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눈까지 감아버리자 아득한 어둠이 찾아왔다. 사실은 가장 나약했던 것은 쿠로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파 가죽을 잡아 뜯을 듯이 손톱을 세워 꽉 쥐며 카가미가 쓰게 웃었다.

카가미 군.”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잠시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어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 카가미는 이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현관으로 달리듯이 걸어갔다. 언제 왔는지 쿠로코가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다녀왔어요.”

집에서 농구화 여분도 찾아왔어요.”쇼핑봉투 하나를 들어 올려 보여주며 쿠로코가 덧붙였다.

카가미는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뜨거웠다. 얼굴을 가린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쿠로코, 나는, 너를. 머릿속이 여러 단어들로 가득 차버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카가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쿠로코를 온전히 눈에 담았다.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카가미를 지켜보고 있던 쿠로코는 그제야 한 걸음씩 천천히 카가미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가미의 바로 앞에 선 쿠로코는 손을 올려 그의 두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카가미 군이 걱정이 돼서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쿠로코의 웃음기 섞인 표정에 카가미는 눈물을 보이는 채로 입술 끝을 올려 힘없이 따라 웃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세상에 남겨진 것은 둘 뿐일지도 모른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파에 앉은 쿠로코에게 기대듯이 안긴 채 카가미는 눈을 감았다. 일정한 박자를 갖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숨소리만이 귓가를 간질였고 어깨를 감싸 쥔 쿠로코의 손이 따뜻했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쿠로코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카가미는 긴 잠에 빠져들었다. 보러 갈게요. 저는 계속 카가미 군의 그림자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던지.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만약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떠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겁고 진득한 잠에 몸을 파묻히며 카가미는 문뜩 떠오른 의문에 조금 몸을 움츠렸다. 의문은 곧 잠에 가려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맞잡은 쿠로코의 손이 뜨거웠다.

일어나면.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카가미는 눈을 떴을 때 할 것들을 정리했다. 쿠로코도 함께할, 다시 돌아온 일상으로의 한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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