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원을 그리다>: http://ehfkehfk24.tistory.com/38?category=699533
<썸만수년째>:
나이를 먹을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더욱 차분해진다던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이십대로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5년이었다. 본디 농구밖에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금도 공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소꿉친구의 말에 따르면 막무가내인 성격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전히 D컵은 되는 모델들이 가득한 사진집을 모으고 있었고, 어찌되었든 스스로 생각하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담을 요청할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상황인 걸까. 아오미네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농구화를 보러가는 길에 카가미에게 잡혀서 마지바로 끌려온 뒤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았고 이제 두 번째 회전을 하고 있었다. 아, 농구하고 싶다. 텅 비어버린 미디엄 사이즈 종이컵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벌써 여섯 번째야!”
카가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한 시간째하고 있는 소리였다. 여섯 번째에 대해 이야기하던 카가미는 햄버거포장지를 구겨 쟁반 옆에 놓고 곧 햄버거 하나를 손에 쥐었다. 벌써 아홉 번째 치즈버거였다. 먹보새끼. 몇 년째 마주하는 먹방이었지만 볼 때마다 놀라웠다. 아직 쟁반에는 치즈버거 서너 개가 남아 있었다. 저걸 다 먹을 때까지는 마지바를 나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빈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둔 아오미네는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랑에 미친 새끼의 한탄이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D컵 가슴 찾기가 더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엉, 그러냐. 리필이나 받아와. 성의 없는 대답을 한 아오미네가 빈 종이컵을 내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질을 냈을 카가미가 본인의 무례함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묵묵히 일어섰다. 적어도 카가미는 무례함이 뭔지는 아는 새끼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소꿉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테츠군이, 로 시작하는 이미 알고 있는 뉴스였다. 중학교 동창의 그 당당한 낯짝을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 여섯 번째가. 다시 여섯 번째 타령이 시작됐다. 콜라를 삼키던 아오미네는 혀를 찼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저 타령이 언제쯤 끝이 날지도 궁금했지만 이 넋두리가 끝이 날 때까지 들어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벌써 두 시간째다. 이젠 모모이를 불러다가 이렇게나 인내심이 넘친다며 소리를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창밖으로 D컵에는 한참 모자란 가슴이 보이고 아오미네의 인내심도 바닥을 찍었다.
미친 새끼야. 다리를 쭉 펴며 그대로 카가미의 다리를 걷어찼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리를 펴면 딱 카가미의 다리가 닿는 거리였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힘을 주고 차느냐 인데, 아오미네는 있는 힘껏 다리를 올렸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그대로 정강이를 걷어차인 카가미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보니 아오미네의 기분도 조금은 풀렸다. 아, 뭐. 카가미가 억울해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뭐. 카가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섯 번째가 테츠랑 헤어졌으면 한다는 거잖아.”
두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그랬다. 그 말에 놀란 카가미가 놀란 햄스터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카가미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곧 적당한 말이 생각났는지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걱정된다고.”
그게 그거지. 아오미네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내며 이로 빨대를 씹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과 대화를 이어가려 해봤자 손해였다. 집에 가자. 아오미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문으로 향했다. 카가미가 무언가 변명을 할 모양이었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소꿉친구에게서 세 번째 문자가 왔다. 당장 튀어오라는 명령이었다. 아아, 빌어먹을. 그 새끼들 사이에 껴서는 되는 일도 망하기 일쑤였다. 아오미네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마른세수를 했다. 누구한테 하소연을 해야 할지 답이 서질 않았다. 친구 중에서 제일 멀쩡하다고 믿던 새끼가 저러니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퇴화하는 새끼들. 아오미네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답답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연을 끊어버릴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뛰어야했다. 아오미네는 소꿉친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사진집을 떠올리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사진집의 위기가 먼저였다. 다른 새끼들의, 그것도 다 큰 사내새끼들의 사랑싸움은 그에게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여섯 번째는 그의 인생에서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녹턴>: http://ehfkehfk24.tistory.com/52?category=699533
<Do You Like Basketball?> : http://ehfkehfk24.tistory.com/5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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