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천천히 써갈 예정

*야수 카가미와 고양이 쿠로코

 

 

오만한 너에게 저주를 내릴 거야. 방금 전까지 늙은 노파였던 이는 어느새 젊은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떤 저주가 좋을까? 얼굴까지 덮은 후드 사이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 나무, 바람. 그녀는 숲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향기를 풍기며 다정하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이가 나타날 때까지 짐승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손등에서부터 붉은 빛의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손톱도 더욱 단단하게 뾰족하게 자라나 짐승의 발톱이 되었고, 붉은 머리칼 사이로는 뿔이 돋아났다. 그가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에게 더욱 떨어져갈수록 점점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마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시종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마녀야! 사악한 마녀! 다른 이들도 따라서 외쳤다. 그중에서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이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성의 주인이 저주에 걸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시종 중 하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리기도 했다. 엉망으로 얽힌 시종들을 마녀는 신기한 듯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마녀라는 존재에 겁을 먹은 이들이 살려 달라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하자, 그에 대답하듯 마녀가 가볍게 검지를 까딱였다. 잠시 눈꺼풀을 여닫는 그 순간에 시종들은 각자의 일에 어울리는 물건과 가구들로 변했다. 성안에는 다시금 정적이 돌았다. 갑작스럽게 몸이 바뀐 이들은 움직이지 못했고, 찻잔으로 바뀐 아이 하나만이 덜그럭거리며 움직일 뿐이었다. 이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시종들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린 마녀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부디 행운을 빌어, 카가미 군.

다시 후드를 쓰고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성을 빠져나갔다. 물건과 가구로 바뀌어버린 시종들은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고, 카가미 또한 그녀를 쫓지 못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시종들보다도 더 나은 상황이리라 생각할 수 있었으나 그 순간 카가미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신발이 찢어질 정도로 크고 흉측한 짐승의 발을 봐버린 탓이었다. 털로 덮인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크게 울부짖는 그는 실로 크고 무서운 한 마리의 야수였다.

 

 

야수와 고양이

 

 

 

01.


방금 전까지 무릎 위에서 꼬리를 살랑이던 고양이는 금세 질렸는지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순 제멋대로잖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고양이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카가미는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일단은 고양이가 그렇게 주장했으니까-를 힐끗 쳐다봤다.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게 목표와 보상만을 명시해둔 계약서의 아래에는 서툰 글씨로 쿠로코 테츠야라는 이름과 ‘Kagami Taiga’라는 영문이름이 함께 쓰여 있었다. 카가미는 서툴게 적힌 쿠로코라는 이름이 고양이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길고양이치고는 꽤 거창한 이름이긴 했지만 장화에 검까지 들고 다니는 고양이이니 아무렴 어떠냐 싶기도 했다. 쿠로코, 하고 카가미는 고양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아주 작게 이름을 굴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비나 야옹이에 비해서는 그다지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한동안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탓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짧게 생각했다.

가구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쿠로코는 다시 카가미의 맞은편의 소파에 바르고 정중하게 앉았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진짜 제멋대로인 고양이구나 싶어 카가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모자에 가려지지 않은 귀가 쫑긋하고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 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길고양이라고 생각하면 꽤 귀엽고 깨끗한 편이다 싶긴 했다. 그 길고양이를 앞으로는 함께 성에서 살아갈-어쩌면 평생을- 녀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복잡 미묘해졌지만.

사람이 가구가 되었다니 신기하네요.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요. 소파는 괜찮은 겁니까?”

모자를 벗어 옆에 조심스레 내려둔 쿠로코가 담담히 물어왔다. 푸드득거리며 움직이는 귀가 어쩐지 신기해서 그곳에 눈길을 주고 있던 카가미는 아, 하고 잠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가?”

긁어도 되냐는 말입니다. 가끔 그런 기분이 되어버리거든요. 고양이잖아요.”

쿠로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늘색의 꼬리도 함께 살랑였다. 이상한 곳에서 고양이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으나 카가미는 애써 충동을 눌렀다. 설마 진짜로 긁기야하겠느냐는 그런 가벼운 생각도 조금 섞여 있었다.

다짜고짜 성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장화신은 고양이, 쿠로코는 야수를 퇴치하러 왔다고 했다. 길고양이 출신으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고양이 활동도 이제 지쳤다고 생각할 즈음에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제안을 받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귀여움을 받고, 살 곳을 받고, 집고양이가 되는 거죠. 쿠로코는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해왔다. 정말로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라면 없애고, 아니라면 오해를 푸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굉장히 사람보다도 사람다운 생각으로 성문을 밀고 들어온 고양이는 성의 주인인 야수를 마주하고 후자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을 맛있게 먹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그 근거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하고 지적하고 싶었으나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받은 것이 목표와 보상을 적는 칸과 사인을 하는 칸이 있는 계약서였다. 이대로는 마을로도 갈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또 다시 다른 이가 올 테니 저주를 푸는 것에 협조해주겠다고 말한 쿠로코는 일을 너무도 간단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계약서에 보상을 적어주고 사인을 한 것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카가미는 털로 덮인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작게 신음을 냈다. 창문 곁에 있는 서랍 위에 올려둔 장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빨간 꽃잎을 넓게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쿠로코가 며칠간 진심으로 고민하여-카가미는 이 점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해낸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괜찮은 사람을 데려와 함께 마음을 맞추어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저주를 건 마녀를 찾는 방법이었다. 둘 다 시도해본 것이어서 카가미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찻주전자가 되어버린 부인이 끓여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쿠로코 몫의 차는 방치되어 식어가고 있었다. 아마 뜨거워서 못 마시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고양이 혀였으니 말이다.

며칠간 카가미가 지켜봐온 쿠로코는 겉모습은 사람-귀와 꼬리가 달려 있다는 것에서부터 틀린 말이지만-같은 형색이었다. 이따금 잘 때나 자신이 필요할 때는 고양이의 모습-색이 옅은 하늘빛 털을 가진 고양이었다-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다. 일단 함께 살기로 하는 동안은 혼자만의 방이 필요할 듯싶어 방을 하나 내주었지만 쿠로코가 방에 머무는 시간은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잠시 볼일이 있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침대 위에는 얇고 가는 검 하나만 달랑 놓여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식사시간에야 고개를 내민 쿠로코는 성이 넓어서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며 밥만 먹고 곧장 사라지곤 했다. 물건으로 변한 시종들이 쿠로코를 보았다는 말이 극히 적은 것을 보면 성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 외출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본인이 말을 해주지 않으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저주를 받아 야수의 모습이 된 자신보다도 더욱 인간다운 고양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카가미는 알 수 없었고, 시종들도 장화신은 고양이에 대한 소문만 들었을 뿐 그를 어찌 대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모르기에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쿠로코가 플랜을 짜오면 거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대화 방법이었다.

이런 나를 좋아해줄 사람이 없잖아.”

마을에서 괜찮은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는 쿠로코의 말에 카가미가 무심한 투로 반박했다. 거칠고 털이 잔뜩 난 짐승의 손인데다가 꼬리는 늑대의 것을 닮았고, 이빨은 무엇이든 물을 뜯을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롭고, 악마의 것을 닮은 뿔을 가진그런 사람을 누가 사랑해줄 수 있을까. 수많은 실패를 겪고 카가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같습니다만.”

부인이 요깃거리로 내어온 쿠키를 오물거리며 씹던 쿠로코가 카가미를 쓱 눈으로 훑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귀엽다면 귀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아지 같고

개는 뿔이 없잖아.”

뿔이 달린 강아지라고 생각하면 되잖습니까. 상상력을 가져주세요.”

상상력 말이지. 그래서 그게 저주를 푸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카가미는 팔짱을 낀 채 쿠로코를 쳐다봤다. 카가미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쿠키를 열심히 먹던 쿠로코는 차가 제대로 식었는지 확인한 후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식어빠진 홍차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었다. 저런 고양이가 정말로 제 주인을 공주와 결혼시켰다는 그 고양이가 맞는 걸까, 하고 카가미는 생각했다. 거인을 물리치고, 머리 좋은 거짓말을 하여 빈털터리 주인과 공주를 결혼까지 시켜버렸다는 대단한 그 고양이 말이다. 촛대가 된 집사가 귓가에 속삭여준 소문의 하나였다. 쿠로코가 찾아와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던 밤이었다. 정말로 해낼지도 몰라요. 촛대가 희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짐승이 된 주인에게 바람을 넣었다. 카가미는 그다지 기대가 없었고 그렇기에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양이가 길고양이일 리가 없잖아. 카가미의 말에 촛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렇다면 왜 사인을 해주었냐고 물을 줄 알았으나 촛대는 조용히 방을 나갔었다. 오랫동안 곁을 지킨 이다운 행동이었다.

상상력을 운운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던 쿠로코는 어느새 카가미의 무릎에 올라 있었다. 예의도 없는 고양이 같으니라고. 무릎을 방석삼아 엎드려 앉은 쿠로코를 내려다보며 카가미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좋은지 꼬리를 살랑이며 앉아 있는 쿠로코를 차마 밑으로 내려둘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날카로운 발톱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쿠로코의 머리와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왠지 애완동물 한 마리를 기르게 된 것만 같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손을 슬쩍 내밀 때마다 쓰다듬을 기다리는 듯 뒤로 접히는 귀가 어쩐지 귀여워서 카가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고양이가 정말로 야수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을의 사람들도 정말로 멍청하구나싶기도 했다.

카가미 군은 상냥하네요.”

고릉거리며 쓰다듬을 받던 쿠로코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카가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랬다면 저주에도 걸리지 않았을 거야.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카가미는 대답하지 않고 쿠로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해주었다. 옅은 빛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많이 부드러웠다.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희미한 숨소리로 바뀔 때까지 카가미는 그대로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야수가 된 이후 처음으로 갖는 차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쿠로코가 내는 소리만 귀에 닿았지만 점차 문 뒤에서 이야기를 엿 들으려 노력하는 시종들의 소리나 성 밖의 짐승들의 소리까지도 귓가를 간질였다. 이렇게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카가미는 잠이든 탓인지 작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쿠로코가 혹시라도 발톱에 긁힐까 조심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작은 고양이는 그의 무릎 위에 몸을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가고 있었다.

 

 

▷▷ ◁◁

 

 

처음에는 상당히 사람보다도 사람다운 행동을 보였던 쿠로코는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고양이다워지기 시작했다. 고양이답다고 해도 겨우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긁는다던가 하는 정도였지만 물건으로 변한 시종들에게는 꽤 커다란 위협이었는지 카가미는 몇 번이고 시종들의 불만을 들어야했다. 그 고양이가 언제 우리를 떨어뜨려 깨뜨릴지 몰라요! 쏟아지는 불평불만들을 들은 채 만 채하며 카가미는 그에게 당부해 놓겠다는 의미 없는 약속만을 되풀이했다. 제대로 된 해결책도 가져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왜 내버려두느냐는 불평은 흘러 넘겨버렸고, 때때로 불평이 도를 넘었을 때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목소리를 낮추길 당부했다. 혹시라도 그것을 쿠로코가 들으면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쿠로코를 쫓아낸다는 선택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저주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 수록 좋든 싫든 정이 들기 마련이다. 카가미는 자주 자신에게 변명을 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밥시간 전까지는 눈에도 띄지 않던 쿠로코가 어디에 있었는지 조금씩 알게 되고, 점차 쿠로코가 무릎에 올라오는 일이 많아진 것은 전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라고 말이다.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고 쿠로코가 흘려가듯 이야기를 해주었던 탓도 있었다. 왠지 따뜻한 무릎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던 쿠로코의 표정이 정말로 즐거워보여서 카가미는 그냥 그렇게 해주고 싶어졌다. 서재에 있는 때만 아니라면 그는 언제나 무릎을 비워두었다. 혹시나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니던 쿠로코가 문을 열지 못할까 문까지 살짝 열어두고서 다과를 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겠지. 오늘도 무릎을 비워둔 채 소파에 바르게 앉은 카가미는 억지로 목까지 채워 넣은 셔츠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쿠로코, 오늘은 뭐 했어?”

소파에 등을 폭 기대며 카가미가 말했다. 그 소리에 한 구석에 숨어 있던 쿠로코가 모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루 종일 구석에서 잤습니다. 촛대 집사님이 너무 잔소리가 많으셔서요.”

정말인지 아침에 잘 정돈해준 머리가 여기저기로 뻗혀 있었다. 쿠로코가 앉을 수 있도록 살짝 옆으로 옮겨 앉은 카가미는 자연스럽게 무릎에 머리를 대고 웅크린 쿠로코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정리를 해줘도 다시 엉망이 되는 머리를 정리해주는 게 귀찮기보다는 꽤 즐거웠다. 보살핀다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기분이 좋은지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를 흘깃 본 카가미는 쿠로코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그 녀석이 원래 잔소리가 많긴 하지. 근데 아침에 매준 리본은 또 어디다 버렸어? 목에 해줬잖아?”

그러게요. 어디로 갔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쿠로코 넌 꼭 어디서 뭘 잃어버리고 온다니까.”

그러면 카가미 군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주워주던가요.”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쿠로코가 꼬리로 소파를 탁탁 치며 대답했다. 꼬리로 불편한 심기를 잔뜩 드러내면서도 무릎 위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을 보면 그냥 보여주기 정도의 표현인 듯했다.

아냐, 리본을 안 풀리게 더 꽉 묶어 줘야했는데 내가 나빴어.”

카가미는 오늘도 쿠로코에게 져주기로 했다. 그제야 다시 살랑거리며 고릉거리기 시작하는 쿠로코가 귀여워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짐승의 손이 되어버린 이후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음을 쿠로코를 통해 깨닫는 중이었다. 옷을 입혀준다던가 리본을 묶어준다던가 하는 그런 것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잠에 취해 단추를 어긋나게 채운 것을 제대로 해주겠다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어느새 매일 아침 쿠로코의 옷시중을 들고 있었다. 시종들은 제 주인이 하찮은 고양이의 옷을 갈아입혀주는 것을 못마땅해 하기도 했지만 카가미는 아무래도 좋았다.

쓰다듬을 실컷 받은 쿠로코는 자신의 머리를 열심히 정리해준 카가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서 핥아주었다. 열심히 손의 털을 정리해주는 쿠로코가 귀여워서 카가미는 얌전히 손을 내어준 채 쿠로코를 무릎에 앉혀두었다.

카가미 군은 왠지 신기한 것 같습니다.”

뭐가?”

왠지 계속 같이 있고 싶어져요.”

결을 따라 꼼꼼히 핥아주던 쿠로코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서는 다시 털을 혀로 정리했다. 카가미는 쿠로코에게 붙잡힌 손이 어쩐지 가려운 듯해서 조금 움찔했지만 이내 쿠로코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상한 기분이다. 때때로 쿠로코가 생각 없이 말을 꺼낼 때면 카가미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졌다. 쿠로코와 함께 하는 순간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발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나 둘 셋. 쿠로코와 손을 잡고서 조심스럽게 스텝을 밟아나가며 이어가는 왈츠를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카가미는 쿠로코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루밍을 하는데 집중을 하고 있던 쿠로코가 그제야 카가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카가미를 두 팔로 꼭 안았다. 카가미의 덩치가 큰 탓에 쿠로코가 카가미의 무릎에 앉아 그에게 매달려 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머리가 아픈 겁니까? 그러게 서재에 오래 있지 말라니까요.”

그런가봐…….”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주는 쿠로코가 귀여워 카가미는 얌전히 쿠로코에게 위로를 받았다. 시종들을 다 물린 덕분에 그 누구도 방해할 사람이 없음에 그는 안심하며 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쿠로코에게서 옅게 바람 냄새가 났다.

 

 

▷▷ ◁◁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요.

쿠로코가 남긴 말은 그게 다였다. 어디를 가는지, 얼마나 다녀오는지도 말해주지 않은 채 쿠로코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정말로 떠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카가미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성에 왔던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쿠로코도 가버린 거다. 성문이 제일 잘 보이는 서재에서 창밖만 내다본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기도 했다.

결론을 내리자 카가미는 쉽게 무너졌다.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쿠로코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탓이었다. 쿠로코가 내뱉은 사소한 말들은 여전히 그의 그림자에 서성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무서워하는 것. 겨우겨우 정리가 되기 시작한 쿠로코에 대한 정보들은 다시금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쿠로코 테츠야, 나의 작은 고양이. 카가미는 고양이의 이름을 혀로 굴려보았다. 영영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름은 어느새 그의 혀에 맴돌고 있었다. 쿠로코에 대한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잃는 것에 더욱 익숙지 않아진다는 뜻임을 카가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성을 방문한 어떤 외지인들보다도 오랫동안 성에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작은 고양이를 자신이 기르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리본을 매어주고 이름을 부르며 쓰다듬어준다고 해서 그를 묶어놓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다시금 실감했다. 쿠로코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길고양이였다.

쿠로코가 떠나자 성은 침묵에 잠겼다. 작은 소동을 몰고 다니던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는 그저 빈자리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고 카가미는 단정할 수 있었다. 쿠로코. 카가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예전 같았다면 그 소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살금살금 다가왔을 쿠로코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카가미는 혹시나 싶어 잠시 서재 안을 둘러보다가 이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쿠로코가 떠났다고 믿으면서도 창문에 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혹시라도 쿠로코가 성문을 두드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그 고양이는 떠난 거예요! 먹여준 은혜도 모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찻주전자 부인이었다. 부인이 입을 열자 다른 이들도 따라서 고양이는 떠났다고 외쳤다.

고양이들은 변덕이 심해요.”

분명 또 다른 사람에게 들러붙었을 거예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그런 작은 녀석이 그 장화신은 고양이라니!”

하인들의 말들은 그의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카가미는 서재에 모여 웅성거리는 하인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그제야 주제가 넘었음을 깨달은 하인들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작은 찻잔인 아이까지 모두가 나가자 서재에는 촛대만이 남아 있었다. 카가미는 촛대가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다시금 명령을 하지는 않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성문과 밖을 이어주는 다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떠난 것은 아닐 겁니다.”

집사가 담담히 말했다. 촛대로 변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집사는 늘 차분했다.

그런 애처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인님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창에 붙어 시간을 죽이는 제 주인을 다시금 바라본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카가미는 창 너머로 시선을 둔 채 대답하지 않고 이마를 창에 슬며시 붙였다. 쿠로코가 보고 싶어. 카가미가 훌쩍이며 말했다. 촛대는 말없이 제 주인이 있는 서재를 밝혀줄 뿐이었다.

 

 

 

 

 

 

 

02.

 

 

처음에는 배신감이 들었고 그 뒤에는 허탈감이 빈자리를 메웠다. 쿠로코는 거짓말을 하고 떠날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카가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보아온 쿠로코는 그런 녀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이 카가미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희망을 가진 그는 일단 무언가를 먹기 시작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창밖만 바라봐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그는 촛대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쿠로코가 없던, 그리고 있던 때에 그랬듯 족히 십인 분은 되는 음식들을 차분히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뒤에는 성안을 돌았고 쿠로코의 잠자리가 되었을 만한 곳을 찾으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체로 비어 있는 방의 구석이나 정원이 잘 보이는 창문 곁이었다. 장갑이나 옷가지가 둥글게 말려 있어서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쿠로코가 떠나가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청소를 도맡아하는 빗자루는 아직 이 장소들을 모르는 모양이라고 카가미는 간단히 추측했다.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옷들은 대체로 쿠로코의 것들-카가미가 쿠로코에게 준 것이었다-이었고, 이따금 셔츠나 자켓 같은 카가미의 옷이 놓여 있기도 했다. 옷 정리 따위를 직접 하지 않던 탓에 없어진 줄도 몰랐던 것들이어서 카가미는 웃음이 터졌다. 깔고 누울 수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었던 거냐, 하고 그는 쿠로코를 혼내듯이 혼자 말해보기도 했다. 옷들을 발견해도 다시 주워두지 않았고, 온기가 남아 있을까 싶어 손으로 살짝 만져본 뒤 그대로 둔 채 다시금 끝없이 넓은 복도를 걸었다. 그게 전부였다.

오늘도 같았다. 쿠로코가 떠나고 한 달은 지나버린 오늘은 다시금 시작되었고,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성안을 걷다가 서재로 다시 돌아온 카가미는 아무것도 없을 줄 알면서도 다시 시선을 얇은 창 너머로 옮겼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쿠로코와 같은 색이라는 생각을 짧게 했다. 그 뒤에 그는 눈을 아래로 옮겼다. 성과 바깥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에 그는 시선을 두었다. 혹시라도 쿠로코가 다시 그 다리를 건너오지 않을까하는 아주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

쿠로코가 떠난 뒤 누구도 오가지 않던 다리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낙엽마냥 보였으나 창에 붙어 자세히 바라보자 작은 고양이였다. 너무 작아서 카가미가 야수로 변한 뒤 눈이 좋아지지 않았더라면 그저 굴러다니는 쓰레기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고양이는 아주 천천히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상처가 있는지 고양이가 발을 디딘 곳에는 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바닥에 새겨지는 붉은 발자국이 어쩐지 섬뜩했다. 볼품없는 고양이가 핏물을 뚝뚝 흘리며 성문으로 다가오는 광경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무섭고 두렵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말이다. 그는 시종을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신이 직접 빠르게 달려 성문으로 갔다. 이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을 줄은 그도 몰랐다. 짐승이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제 발로 나서본 적이 없던 카가미는 처음으로 야수의 몸으로 성문을 열고 나갔다. 본디 문지기가 열어주었던 문을 제 손으로 힘주어 민 그는 자신이 나갈만한 틈이 생기자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 다리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고양이가 자리에 멈췄다. 가까이서 본 고양이는 멀리서 본 것보다도 더 상처가 심해보였다. 무슨 색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에 젖은 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던 카가미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고양이를 향해 뛰어갔다. 작은 몸의 고양이가 카가미를 향해 울었던 탓이었다. 너무 작은 울음소리는 바람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시 성안으로 뛰어 들어온 카가미는 급히 시종들을 찾았다. 카가미의 흰색 셔츠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주인의 부름에 가장 먼저 뛰어나온 집사는 주인의 품에 안겨 있는 붉게 물든 작디작은 짐승을 보고는 먼저 계단을 올랐다. 이리로 오라는 뜻임을 그는 쉽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촛대를 따라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가는 내내 손바닥만 한 작은 고양이는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고양이를 침대 위에 눕히며 카가미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양이의 피로 붉게 물이 드는 시트 위로 물이 뚝뚝 떨어져 작은 작은 자국이 생겨났다.

죽지 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카가미는 그대로 고양이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피투성이인 고양이가 혹여 작은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을까 그는 두려웠다.

죽지 마, 쿠로코…….”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그것이 전부였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누군가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 마냥 숨이 막혔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시트 위에 놓인 작은 고양이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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