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만은 변치 않았다. 단호한 대답을 내놓고 뒤돌아섰던 그 뒤통수를 떠올렸다. 많이 늦었지. 아주 많이. 이제껏 실감하지 못하던 간격이 아주 오랜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카가미는 긴 한숨과 함께 소파 등받이에 스스로를 깊숙이 파묻었다. 틀린 말은 무엇하나도 없어서 제대로 된 대꾸조차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쿠로코가 옳았다. 그뿐이었다.

MVP트로피를 거머쥐던 그 순간에야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 그 든든한 등을 쫓아 일본으로 왔다. 수십 수백 번을 다짐하다가도 금세 잊혀져버렸던 그 말을 다시금 가슴에 품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가서, 만나서, 말하자.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목적이었다. 그것을 결심하게 된 이유 따위는 이미 희미해진 뒤였기에 그저 그런 목적의식 하나를 품에 안고서 그를 찾았다. 당연한 결과였다고 카가미는 생각했다.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쿠로코에게는 분명 더 긴 시간이었으리라는 추측도 덧붙여졌다. 체감하는 시간자체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코트 위에서의 시간과 그 밖에서의 시간은 무엇 하나 겹쳐지지 않는 음악이었다. 빠르고 느린 박자로 흘러가는 스텝. 쿠로코는 클래식과 같은 선율 위에서 그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아주 쉬운 상상이 가능했다. 도서관에서의 쿠로코를 바라볼 때면 들려오던 이름 모를 피아노연주처럼 말이다. 그쪽과 이쪽이라는 선을 그어버리던, 그때의 그 음을 카가미는 한동안 잊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곧 쿠로코 자체를 잊고 살아왔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음을 카가미는 깨달았다. 코트 위에서의 카가미 타이가의 삶에 쿠로코 테츠야는 아주 작은 그림자 한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낙심한 걸까. 겨우 이런 걸로? 축축 쳐지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며 카가미는 스스로의 나약함에 조금 놀랐다. 지독하게 져버렸던 경기에서도 이렇게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우울감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승부욕이 들끓어 모두 소진했을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홀로 연습을 했을 정도로 다음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우 단 한번 거절당한 것 정도로 이렇게 무력해지다니 놀라울 따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만큼 쿠로코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다른 것과는 달랐던 걸까. 이제는 알 수 없어진 미지의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카가미는 작게 실소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채였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와버렸다. 술 한 잔도 하지 않았으나 취한 듯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눈물에 섞여 있던 말들, 그 때의 모든 것들은 입안에 씁쓸함을 남긴 채 구덩이로 휩쓸려 내려가 버렸다. 남은 것은 이런저런 변명이 섞인, 초라하고 무의미한 단어로 이루어진 고백뿐이었다.

 

 

쿠로코? 쿠로코라면 학교에 있을 거야.”

며칠 전의 모임을 주도한 후리하타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처음으로 먼저 연락을 해온 카가미가 꽤 신기한 듯 바라보던 그는 쿠로코의 이야기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푸핫, 하고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음을 카가미는 그 행동에서 짐작할 따름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에 자신이 취한 행동도 알고 있지 않을까. 어쩐지 그럴 것만 같아서 카가미는 조금은 씁쓸한 뒷맛을 삼키며 다시금 되물었다.

대학교?”

설마. 우리가 졸업한지가 언젠데. 쿠로코 그 녀석, 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이 됐어.”

유리컵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 아이스 라떼를 휘휘 저으며 후리하타가 말했다. 보육교사가 되겠다고 하다가 결국 부전공으로 다시금 농구에 손을 대어버렸다는 그런 간단한 이야기였다. 모임에서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다. 쿠로코가 어떤 방식으로든 농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카가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테이블을 두 손으로 크게 쳤다. 테이블에 크게 흔들리며 주위의 시선도 저절로 이쪽을 향했다. 컵에 담긴 커피가 흔들리며 테이블 위로 조금 쏟아지며 소매 자락에 얼룩을 남겼다. 주위가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후리하타가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해왔다. 누군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걱정이 담겨 있었으나, 그 순간의 카가미에게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테이블에 대고 있던 손으로 커피가 흘러와 손가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카가미의 머릿속을 물들였다. 까맣게 변색되어버린 기억들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저는 아니에요.

정말로 오랜만에 본 쿠로코는 기억하던 것보다도 좀 더 단단한 등을 갖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때의 쿠로코 테츠야가 아닙니다.

담배 냄새가 밴 손으로 가볍게 카가미의 가슴을 밀어낸 쿠로코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떤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멀어지는 등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쿠로코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좋아했는가.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은 그렇게 휩쓸려서 흘러가버렸다. 손가락만을 물들이고 사라져버린 수많은 기억들과 말들은 그 무엇도 남기지 못했다. 카가미 군. 맞부딪힌 주먹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아도 그 때의 쿠로코의 표정은 기억할 수 없었다. 쿠로코를 찾아가자.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린 카가미는 커피에 젖어 찝찝해진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어 차키를 찾아냈다. 그리고 무작정 달려 나갔다. 그를 만나야만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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