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짝이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몸 어딘가에는 소울메이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것은 곧 그들을 이어주었다. 정해진 운명을 따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만나 평생을 함께 하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남겨진 생명은 또 다시 운명을 따라 짝을 찾아간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순환의 고리로 여겨졌다. 운명의 짝이 정해져 있는 ‘네임드’가 대다수이고, 짝이 없는 ‘노네임드’가 소수인 세상. 노네임드에 대한 차별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노네임드에 대한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꼬리표가 붙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에 질린 노네임드들이 잘 보이는 곳에 가짜 네임 문신을 하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 네임드가 부작용을 감수하고 짝이 아닌 다른 이와 사랑을 하기위해 네임을 지웠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었지만, 그런 일은 흔치 않았다.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몸 어디에도 이름 하나 적혀 있지 않는 노네임드는 설자리가 없었다. 노네임드로 태어난 이들의 대부분이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눈초리 때문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어. 담배를 물고서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쿠로코는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하던 사람도, 그 때의 상황도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울음을 참고 있었을까. 쿠로코는 담배연기를 길게 뱉었다. 창밖에는 봄이 와 있었다. 만개한 벚꽃들이 아름답게 바람에 날리는 봄. 쿠로코는 늘 나무를 보고서 계절을 알았다. 벚꽃이 피면 봄, 푸른 잎이 보이면 여름, 낙엽이 떨어지면 가을, 잎이 사라지면 겨울. 벽에 걸린 달력은 그저 손님이 다녀간 날에 동그라미를 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두어 명은 오던 손님이 최근에는 거의 없어진 탓에 4월로 넘어간 달력에는 동그라미 하나 그리지 못했다. 달력은 낙서하나 없이 깨끗했다.
쿠로코는 피부 아래에 이름을 새겨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원하는 자리가 어디든지 마치 진짜 네임이 발현한 것처럼 문신을 새기는 일이었다. 특수 염료를 흡수 시킨 실을 매단 바늘로 얇은 피부 아래를 수십 번 통과해야만 나타나는 글자. 쿠로코는 글자 하나하나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같은 한자라도 크기나 모양이 같지 않도록, 조금은 달라보이도록 노력했고, 손님마다 글씨를 달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신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진짜가 되어야만 하는 네임이었다. 연예인의 이름을 가져오거나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가져와 새겨달라고 하던 이들은 모두 어딘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문신으로 가짜 이름을 새겨도 달라지는 것은 없음을 자신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운명은 그들에게 짝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쿠로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임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노네임이라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적어도 세간에 알려진 것에 따르면 그랬다. 네임드로 태어난 이들은 몸 어딘가에 적힌 이름을 따라 짝을 찾았고, 한 명이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쿠로코의 부모도 그중 하나였다. 쿠로코는 어머니의 왼손 약지를 반지마냥 감고 있는 글씨를, 아버지의 등팍에 단단히 새겨진 글씨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반지보다도 영원한 글씨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했고, 쿠로코를 탄생시켰다.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자신들이 그러했듯 그들은 쿠로코 또한 네임드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갓 태어난 아이의 몸에 아무런 네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의 표정을 쿠로코는 쉽게 상상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죽기 전까지 짓던 표정이었다. 사랑 없이 태어난 아들을 마지막까지 걱정하고, 동정하던 눈빛. 아버지의 병마가 끝맺을 때, 그들은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곧 그 곁을 지키던 어머니가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죽어갔다. 있을 거야, 짝이, 어딘가에. 쿠로코는 숨소리 사이로 들리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마저도 행복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 사랑의 결실을 남기고 간다는 행복. 쿠로코는 그들의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노네임드로 태어난 아들을 마지막까지 걱정하며 떠난 부모가 너무도 그리워서였다.
노네임드, 쿠로코는 자신에게 붙여져 있던 꼬리표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딜 가도 따라다니는 그 이름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쿠로코를 괴롭혔다. 사랑이 없으니 냉정할 것이고, 사랑이 없으니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며 그렇기에 격리해야만 하는 존재. 쿠로코는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쿠로코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책상 앞으로 갔다. 책상 위에는 책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휴대폰은 그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쿠로코는 재빨리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아카시에게서 온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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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건물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빌딩 하나. 쿠로코는 한숨을 푹 쉬며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몇 달 만에 오는 ‘회사’였다. 쿠로코는 겉옷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물 앞에 섰다. 커다란 유리문을 오가는 사람이 몇 명 보였지만, 눈에 익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쿠로코는 마지막으로 회사를 왔던 때를 떠올렸다. 몇 개월 전, 본업인 문신사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사표를 내러 사장인 아카시를 찾아갔었다. 아카시에게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아카시에게 거절을 당하고 잠시 휴직처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안에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아카시를 말로 당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회사를 들어올 때에도 아카시의 설득에 못 이겨 거의 억지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쿠로코는 아카시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유리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쿠로코는 변함없이 화려한 중앙 분수대와 장식물들을 눈으로 훑으며 눈에 띄지 않게 제일 위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워낙 높은 빌딩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여러 대가 비치되어 있었지만, 상층까지 빠르게 가는 방법은 vip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 하는 것이었다. 전용 카드가 없으면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쿠로코가 입사와 동시에 아카시에게 사용카드를 받아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입구는 유리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쿠로코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찾아 카드 인식기에 그것을 올렸다. 인식은 수 초 이내에 이루어졌고, 엘리베이터 문은 금방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쿠로코는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최상층과 일층 버튼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쿠로코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카시의 집무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소재가 불분명한 벽,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는 장식물들. 쿠로코는 걸음을 빨리했다. 어느새 복도가 끝나고 나무문이 나타났다. 오래된 나무로 된 문이었지만, 세밀한 조각이 되어 있어 건물이 풍기는 느낌과 잘 어울리는 문이었다. 가벼운 노크를 한 쿠로코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시의 집무실은 극단적으로 깔끔했다. 업무를 위한 넓은 책상 하나와 손님 접대용 테이블 하나, 소파 두 개를 제외한 다른 가구는 없었다. 전보다도 가구가 더 줄어든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테츠야. 보고 싶었어.”
소파에 앉아 있던 아카시는 들어오는 사람이 쿠로코 임을 알았던 모양인지 놀라는 기색하나 없이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어투였지만, 시선은 손에 들린 서류를 향해 있었다. 자기가 불렀으면서 관심도 주지 않는 것 같아 쿠로코는 내심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카시 군. 쿠로코는 나지막이 아카시를 불렀다. 아카시의 얼굴은 서류에 가려져 있어 쿠로코는 아카시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서류너머의 아카시의 표정을 떠올리며 쿠로코가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복직은 아직 생각에 없습니다만.”
“요즘 한가하다는 건 알고 있어.”
아카시는 서류를 테이블에 놓고 오른손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노네임드도 드문데, 굳이 네임까지 적으려는 사람들이 몇 이나 되겠어. 시간 낭비일 뿐이야.”
“그래도 일단은 본업입니다. 아카시 군의 등판에 호랑이 한 마리를 넣은 사람이 저였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제 나름의 걸작이에요.”
아카시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쿠로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그랬었지. 아카시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쿠로코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다른 것에는 자신이 없는 쿠로코는 문신에 관해서만큼은 프라이드가 높았다. ‘시간 낭비라는 말은 취소할게.’하고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어투로 말한 아카시는 방금 전까지 보던 서류를 쿠로코 쪽으로 밀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로 아카시를 노려보던 쿠로코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평화주의자가 된 겁니까. 서류에 적힌 내용에 혀를 내두르며 쿠로코가 비꼬듯 말했다. 아카시는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 쿠로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그런 얼굴을 할 때가 제일 무섭습니다, 아카시 군.”
“이걸 시작해볼까 하는데 일손이 부족해. 복직해, 테츠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페이퍼컴퍼니를 굳이 거창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농구구단까지 사면서까지. 누구 취밉니까, 이건?”
“정확히 하자면 페이퍼컴퍼니는 아니지. 밀수와 청부가 본업일 뿐이야. 테츠야가 스포츠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이참에 조금 밝은 곳에서 활동해보라는 거야.”
구단관리가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만 같은 아카시의 태도에 쿠로코는 이미 질려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티내지 않았다. 나이차로 보면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니 아카시에게는 쿠로코가 아무리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었어도 어린아이로 보이리라.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말을 한 쿠로코는 아카시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절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거절하면 또 다른 방책을 내놓을 사람이다. 아카시와 쿠로코의 인연도 10년이 넘었고, 쿠로코는 아카시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새긴 호랑이 문신 아래, 지독하게 남은 흉터만큼은.
이야기는 결국 아카시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내일 사람을 보내겠다는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대답을 대신해서 잠시 그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 것마저도 귀여운 반항정도로만 보이는 모양인지 아카시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방은 그대로 뒀으니까, 짐만 적당히 가져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서는 쿠로코에게 아카시는 내일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쿠로코는 대답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힘을 주어 문을 닫았다. 쾅. 거칠게 닫힌 문 뒤로 아카시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비웃음인지, 귀여워하는 건지. 쿠로코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2.
나온 김에 장까지 본다는 것이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두 손 가득한 짐을 내려다보며 쿠로코는 한숨을 푹 쉬었다. 타임세일이네 뭐네 하는 바람에 평소 먹는 것보다 많이 사버린 것이 이제야 후회가 들었다. 게다가 내일이면 회사로 이사를 가야하는 판에 왜 이렇게 많이 사와 버린 것인지.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갈 식재료들을 들고서 쿠로코는 집을 향해 걸었다.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이 위치해 있는 거리를 걸으며 쿠로코는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커다란 물체 같았다. 언뜻 보면 커다란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로등이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탓에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쿠로코는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갔다.
“어…. 저기….”
물체는 사내였다. 집 앞에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였다. 훨씬 남자는 쿠로코를 발견하자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쿠로코는 평소 손님이 오면 그러하듯 빠르게 그의 복장을 훑었다. 사람을 복장으로 평가하고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관찰이라는, 그의 어쩌면 독특할지도 모르는 취미생활에서 오는 버릇이었다. 남자는 위아래로 몸과 맞지 않는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지만, 쿠로코는 남자가 어느 정도 몸이 다져진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따라 그려지는 선이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를 연상시켰다. 꾸준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쿠로코는 여전히 우물 쭈물거리고 서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검붉은 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문신, 하실 겁니까?”
쿠로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쿠로코의 말에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손님이라는 뜻이었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름을 새기는 것이니 금방 끝나는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쿠로코는 남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예요!”
어색하게 덧붙인 존댓말에 쿠로코는 남자가 일본인이 아닌 타국인일까 생각했다. 겉모습은 아시아계였으니 근처의 어딘가 중 하나거나 혹은 타국 생활 중에 귀국한 이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닫힌 문을 연 뒤에 남자를 접대용 방에 안내한 쿠로코는 주방에 가서 장봐온 것은 대충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간단한 과자와 차를 내왔다.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의 태도로 보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기다린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이정도 서비스는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고개를 돌려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쿠로코는 선반에 올려 진 스크랩북을 내려 남자에게 건넸다.
“샘플 북입니다. 이름은 어떤 걸로 하실 겁니까?”
“네임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문신을 하려고. …예요!”
“…죄송합니다. 여긴 이제 네임만 문신해드려요.”
간판하나 없는 가게를 일부러 찾아올 손님은 단골이나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 밖에 없었다. 아마 남자는 오래전에 문신을 한 손님에게 소개를 받은 모양이었다. 네임만 문신하는 것으로 업종변경을 한지 벌써 3년이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찾아온 일반문신 손님이 쿠로코의 입장에서는 영 달갑지 않았다.
“그럼 안 되는 거야?”
남자가 쿠로코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젠 완전한 반말이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쿠로코는 잠시 볼을 긁적이다가 소파 옆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다른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기억을 더듬어 그전에 왕래하던 문신사들을 떠올려 메모지에 적어 남자에게 건넸다. 지금도 문신을 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한 이들이었다.
남자는 종이를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쿠로코의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란 쿠로코가 뒤로 물러섰지만 소파에 앉아 있던 터라 소파에 바싹 붙어 앉은 것이 될 뿐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쿠로코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네가 해줬으면 해!”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가 소리쳤다. 소리쳤다기보다는 호소하는 것에 가까웠다. 짐승 한 마리가 포효를 하는 것 같았다. 쿠로코의 새하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남자의 검붉은 눈을 마주하고서 쿠로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쿠로코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갖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변태인 걸까, 아니면 문신이 너무 하고 싶은데 안 된다는 것에 너무 실망해서 화가 난 걸까. 어찌되었든 남자에게 붙잡힌 손목이 너무 아팠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의 나머지 손이 다가왔다. 겉은 멀쩡한 사람이라도 역시 속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쿠로코는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망설임 없이 남자를 향해 던졌다. 아카시에게 선물 받은 장인이 빚어 높은 온도에서 구웠다는 고급 찻잔이 깨지는 것보다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 시급하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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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면 타츠야라는 사람이 저를 소개해줬고, 저에게서 꼭- 문신을 받으라고 했다는 거군요. 그래서 본인이 그렇게 필사적이었던 것이고. 맞습니까?”
“응!! 맞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쿠로코는 이내 손에 쥔 고급 찻잔을 테이블에 놓아두고, 그것과 한 짝이었던 찻잔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카시가 선물해준 찻잔을 깨먹었다는 것만으로 화를 낼 인물은 아니었으나 찻잔에 담겼던 추억이 있기에 차마 이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미안, 해요. 잔이 깨진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마냥 쿠로코의 눈치를 보던 남자가 조용히 사과를 해왔다. 반말인지 존댓말인지도 알 수 없는 사과였다. 쿠로코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소파에 앉은 채 힘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 쳐진 어깨가 힘 빠진 호랑이 같다는 생각에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내리쳤다.
어엉. 남자가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쿠로코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한 동시에 쿠로코는 남자의 눈썹이 양 끝에서 양 갈래로 찢어진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V(브이)눈썹. 쿠로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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