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등학교에서 같은 부활동을 했던 이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참석을 권하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미안함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갈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나를 바보 같다고 말하거나, 뒷통수를 세게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의무는 나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기에 누구에게 동정을 들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하고 싶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 평소의 일상을 잃지 않는 사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늘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나의 삶은 너의 눈에는 비이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다. 나는 그저 다른 이들이 내게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는 이것을 알아주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임을 네가 이해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태생이 나약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타인에게 의지를 하려 들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너는 일본인이었지만 어린 시절은 미국에서 보낸 흔히 귀국자녀라 불리던 이였다. 겉은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했지만 천성은 상냥한 사람이었다. 내가 농구를 그만둘 것이라 선언했을 때 너는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나를 격려하지도 않았다. 네가 나를 배려해서 그리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쭙잖은 위로는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이라는 것을 너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너는 내가 새로운 삶을 찾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으로 네가 나를 비난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산산조각이 되어졌을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나는 새로운 삶을 찾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너는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수십 걸음 나아갔다. 나아가는 너의 뒷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욱 넓었고, 든든해보였다. 너는 누구라도 감싸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너에게 더 이상 닿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 때 직감했다. 너의 등을 바라보던 시간은 이제 과거가 될 뿐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너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의 길을 바라봤다. 너를 잊거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아가는 네가 부러웠을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제자리에 서서 네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만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아가는 무엇인가가 되고자 했다. 그것이 너와의 거리를 벌리는 일이 될지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너와 대등해지고 싶었던 것 같았다. 너를 옆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바람은 그것뿐이었다.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예전에는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이 이제는 그저 한낱 쓰레기로만 보였다. 준비해온 상자에 책을 담고서 나는 책상 위에 함께 있던 노트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상자에 넣으려 했으나 결국 그 시도는 마음처럼 되지 못하고 노트는 다시금 책상 위에 올려졌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어렴풋이 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비는 싫은데 큰일입니다. 작게 중얼거리며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질되지 않은 정원이 보였다. 처음 집을 얻었을 때는 열심히 손질도 했지만, 한 없이 자라는 잡초들의 기세의 못 이겨서 포기해버렸다. 제멋대로 자라나는 잡초들은 마치 너를 닮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사나운 너를 닮은 것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그래서 나는 늘 웃음을 터뜨렸다. 한 달 전에 자료조사를 위해 떠났던 여행길에서는 너를 닮은 길고양이를 보았고, 농구를 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사진으로만 접했던 너의 어린 시절을 느꼈다. 너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닮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늘 웃어야만 했다.
“보고 싶어요.”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어느새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습니다.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물기가 묻어났다. 짙어진 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고개를 들자 젖어가고 있는 거리가 보였다. 빗소리가 가득 차고 있었다. 나는 그날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너를 불러보았다. 나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젖어서 아래로 가라앉았다.
너와 나 사이에는 제대로 된 속마음이 오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는 바빴고,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하는 척 하느라 바빴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서로 원해왔지만, 너와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서로의 손가락만 겨우 붙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너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와 너의 사이가 가까웠다며 나를 찾았지만, 나는 방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너에 대하여 어떤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너에게 닿지 못한 나약한 존재였고, 너를 혼자 둔 장본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소리 내어 너를 부를 수 없었다. 너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너에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너를 막을 수 있을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빗방울은 집안으로 들어와 발을 적셨다. 나는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소매로 문질렀다. 눈가가 따가워졌다. 쿠로코. 어디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너는 보이지 않았다. 바보. 너는 늘 그랬지만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한 마디 말조차도 해주지 않은 너를 원망해보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그것조차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너에게 남길 수 있는 말조차도 없었다. 불공평한 상황이었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방안에서 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책무였다.
내가 대학생이 될 무렵, 너는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으로 갔다.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그곳으로 갔다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너는 그곳에서 농구를 했고, 수많은 선수를 제치고 꽤 괜찮은 팀에 들어가 NBA에 입성했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이었다. 너는 NBA에 입성한 뒤에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곧 일본의 농구스타라는 호칭을 얻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부와 명예, 너는 그것들을 손에 쥐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 수 있었고 너는 나의 소식을 어느 누구에게서도 전해들을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나의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이들과 연락을 끊어왔고 너와 연결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의 연락처를 알고 있지 않았다. 훗날 다시 만난 너는 그런 나의 태도를 비난했고, 다시금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이어주었다. 그때는 그저 친구로서의 걱정이라 생각했던 행위가 이제는 나를 막기 위한 행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너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그때부터 예상했던 것이 아닐까. 나를 비난하고 추궁하고 몰아가기위해 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는 말도 안 되는 생각들만이 남았다.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조금씩 너를 원망해가고 있었다. 너는 그것을 바랬던 걸까.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의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알던 너와 언론 속의 너는 너무도 달랐다. 내가 알던 너는 농구밖에 모르는 바보였으며 요리와 집안일을 잘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런 너는 언론 속에 비쳐질 때 사나운 짐승의 모습으로 보였고, 자주 스캔들을 일으켰다. 내가 아는 너와 텔레비전 속 너는 너무도 달라서 나는 네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같은 건 잊었다고 생각했다. 우연처럼 너를 다시 만났던 날. 너는 내가 알던 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쿠로코. 울 것 같은 얼굴의 너를 보는 순간 나는 몸이 굳어버려서 무슨 말을 꺼내야하는지조차도 잊어버렸다. 너는 나를 꽉 껴안았고 나는 그런 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그런 것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지조차도 말로 내뱉지 못한 상태로 그렇게 지내왔다. 시간이 있으면 만나서 시간을 함께했고, 시간이 닿지 않으면 가끔 문자나 전화를 주고받았다. 너는 시간이 닿는 날보다는 닿지 않는 날이 많았음으로 너와 함께한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마 네가 그대로 있었더라면 나는 너를 찾아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렇게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날은 네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던 날이었다. 너는 나에게 오기로 하던 그 날 다시금 뉴스에 올랐다. 싸움, 스캔들, 마약, 도박. 너를 괴롭히던 것은 수없이 많았기에 나는 뉴스를 보면서 그중 하나가 언급되리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마약이 언급되었지만 내용은 내가 생각하던 가십 기사와는 달랐다. 그 안에서 너는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고, 사인은 자살로 되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뉴스를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하게도 너는 받지 않았다. 너는 약을 하고 손목을 깊숙이 벴다. 그리고 욕조 가득 물을 받아 그곳에 손을 담근 채 서서히 죽어갔다. 언론은 그렇게 말했다. 거실에는 대충 휘갈겨 적은 'I'm sorry, my love.'이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고, 너는 그렇게 죽었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나는 너의 쪽지를 알렉스씨에게서 넘겨받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찾아왔다. K선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애인 K씨. 내가 불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너에게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고 너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게이인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자살했다는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너는 어디에서나 당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내게 남긴 곳으로 떠났다. 그곳이 지금 이곳이었다. 너는 내게 무엇을 원했던 걸까.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했던 걸까.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직 열지 못한 상자들은 방에 어지럽게 쌓여 있고 너는 이곳에 없었다. 더 이상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할까. 나는 빗소리 속에서 너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사진으로 접한 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봤다. 하얗게 질린 피부와 입술, 편안하게 감긴 눈. 너는 잠에 든 것처럼 보였다. 나도 너를 따라 잠들 수 있을까.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옆으로 치워두고 빗물에 젖은 바닥에 누웠다. 빗소리가 거칠게 귓속을 헤집었다. 눈을 감았다. 비에 젖은 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카가미군. 나는 너를 불렀다. 너는 조용히 등을 보였다. 그리고 나아갔다. 축축하게 젖은 너의 등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너는 정말로 보이지 않은 곳으로 멀리 걸어가 버렸다. 나는 자리에 멈춘 채 너의 심장소리를 떠올렸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빗소리만이 너의 심장소리를 대신할 뿐이었다.
일어나서 밥을 먹자. 그리고 잠을 자자. 일어나면 다시 밥을 먹고, 정원을 정리하자.
나는 차가워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살아갈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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