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My Happy House
사랑은 언제든 식을 수 있다. 카가미는 그 사실을 깨닫는 것에만 몇 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고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얼굴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사람으로 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만난 파트너는 지루했던 삶에 빛을 더해준 사람이었다. 평생을 해도 즐거우리라 생각했던 쿠로코와의 동거생활은 하루하루 다툼으로 채워져 갔고 그 이질감을 견디지 못한 카가미는 결국 서로간의 큰 벽을 세웠다. 눈에 보이는 벽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태도를 그리 부르고 있었다.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가 마주칠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벽을 세워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벽이 있든 없든 일상이었고 평소와는 다르지 않은 구질구질한 하루였다. 예전에는 어떤 것에도 행복에 넘쳤었다. 늘 헝클어져 있는 머리칼이나, 늘 고집스럽게 닫혀 있는 입술 따위 같은 것에도 말이다. 동거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 함께 있기에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던 시절은 이제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지금의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젠 이 생활도 지긋지긋했다.
동거를 시작하고 2년 즈음이 지나자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날이 늘어갔다. 누구의 잘못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던 것이 더 많았던지라 서로에 대한 원망도 쉽사리 할 수 없던 싸움이었다. 농구선수로의 활동에 첫발을 디딘 카가미는 본인의 일만을 하기에 바빴으며, 대학문제와 취업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쿠로코는 매일 밤 집에 오지 않는 애인을 원망하기에 바빴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전화 한 통조차도 없는 외박에 쿠로코는 수많은 가능성을 세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카가미가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원망을 쏟아냈다. 쿠로코가 예민해진 것은 본인의 탓이라고 카가미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남자와 잤냐는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은 쿠로코뿐만이 아니었다. 카가미 본인도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은 상태였다. 누구든 애인의 바람기를 의심할 수 있지만 쿠로코는 너무 과했다. 카가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사인만 하면 끝나는 계약서가 눈앞에 있었다. 짧은 선수생활 끝에 손에 넣은 미국행 티켓이었다. America. 꿈의 나라. 농구의 고장.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카가미는 언제나 미국에서 농구를 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팀과의 계약도 딱 한 달 남아 있었으니 타이밍도 완벽했다. 이런 계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충 봤을 때 연봉도 대우도 꽤 괜찮은 편인 것 같았다. 계약서 종이 옆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 카가미는 고개를 들어맞은 편에 앉아 있는 스카우터를 바라봤다. 어서 사인해요. 눈이 마주치자 스카우터는 방긋 웃으며 계약서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미국행 티켓을 놓아버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카가미는 계약서 위에 영문으로 된 사인을 휘갈기고 펜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한 스카우터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인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카가미가 그의 손을 맞잡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계약은 성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달 뒤에 미국으로 떠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사실을 쿠로코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전달방법만 거의 10분을 고민하던 카가미는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적었다. 한 달 뒤에 미국에 가. 일방적 통보였다. 전송을 누른 뒤 카가미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Good bye, My sweet heart!
오늘도 호텔 행이었다.
***
집을 보러 다닌 것은 거의 오 년만이었다. 지금 생활 중인 집은 그와 함께 손을 잡고 부동산을 돌아다닌 결과로 얻은 집이었다. 당시에는 구입하지 못했던 집을 이제는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둘 중에 어느 누구도 집을 사자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인데.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머릿속에는 늘 그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벽이 세워지고 오 개월이 흘렀으니 그 생각도 아마 그 즈음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동산 직원이 추천하는 집들을 하루 종일 보러 다녔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매물은 없었다. 결국 체력이 바닥이 난 쿠로코는 더 이상 집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기한이 한 달 밖에 남아 있었지만 여차하면 혼자서 한 달을 더 살면 되는 일이었다. 명의를 바꾸기 위해서 계약서를 다시 써야겠지만 그런 수고정도야 얼마든 할 수 있었다. 급하다고 아무 집이나 덜컥 계약해버리는 것보다야 그편이 더 나을 듯 했다. 집세가 조금 비싼 편이고 혼자 살기에는 큰 집이지만 한두 달 정도쯤은 괜찮았다. 어차피 혼자 살다시피 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큰집이 허전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진 않을 것이었다. 쿠로코는 주인아주머니의 번호가 휴대폰에 잘 저장이 되어 있나 확인한 후 집을 향해 걸었다. 택시를 타고 와버렸으니 아마 돌아갈 때도 택시를 타야할 것 같았다. 어쨌든 큰길을 찾아야 함은 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왔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걸었다. 열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피부를 할퀴듯 지나갔다. 멀리 와버렸나 보군요. 끝이 안 보이는 도로를 바라보며 쿠로코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택시를 잡고 집까지 돌아오는 것에만 거의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다. 아침으로 억지로 씹어 삼킨 식빵을 제외하고는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이 떠오르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저녁메뉴를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음식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카레 냄새였다. 웬일이지. 여간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던 그가 집에서 심지어 요리까지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쿠로코는 이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있는 식탁에 앉아 카레를 먹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쿠로코는 입을 꾹 다문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는 아침에 봤던 것과는 다르게 텅텅 비어 있었다.
“……미안. 간식거리는 낮에 먹어버렸고, 야채는 카레에 전부 넣어버렸어.”
먹기에 바빠 보이던 카가미가 숟가락을 놓고 미안한 듯 눈치를 봤다.
“카레 먹을래?”
며칠 만에 하는 대화가 영 어색했다. 뭐라 대답할지 답을 찾지 못한 쿠로코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카가미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릇 가득 밥을 담았다. 카레까지 부어진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은 카가미가 먹어, 하고 무심히 말했다. 개에게 밥을 주는 말투였다. 저런 점이 싫었다. 싸우기에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아 카가미가 차려준 카레를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었다. 속이 더부룩한 것이 곧 채할 것 같았다. 그만 먹어. 배부르잖아. 어느새 그릇을 깨끗이 비운 카가미가 그를 힐끔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함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였다.
“집 보러 다닌 거야?”
부엌을 나가려던 그를 카가미가 붙잡았다.
“그냥 여기서 살아도 상관없어.”
대화를 하자는 신호였다. 아직 기간도 남았고. 카가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잖습니까. 여긴.”
“응,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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