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광과 이어지는 의미없는 조직물.


외투가 무거웠다. 방금까지 뜨겁다고 느꼈는데, 어느새 추워졌다. 비에 젖은 탓이다. 그는 자꾸만 몸에 붙어오는 외투를 벗어 바닥에 던지듯 내버려두었다. 외투는 진흙과 핏물이 섞인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이미 많은 것들에 검게 물들어서 더 이상 물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외투 위로 핏빛이 비쳤다. 새로 사면 그만이다. 몸에 들러붙는 셔츠까지는 벗어던지지 못한 채 그는 하염없이 걸었다. 분명 근처에 차를 세워두었는데 장소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길은 그대로 그 자리에 늘어져 있음에도 미로가 된 것 마냥 그는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업소가 뒤엉켜 치안이 좋지 못한 탓인지 그의 몰골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드물었다. 비오는 날에도 손님을 잡아야하는 업소의 여자들은 이따금 흘깃 눈길을 주다가도 곧 눈을 돌리고 보지 못한 채를 떨었다. 흰 셔츠가 빗물과 피로 물들어 있음을 깨달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리 생각했다. 그도 아니라면 돈이 안 되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넘기며 그는 이전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주차해둔 차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는 눈을 천천히 껌뻑이며 가로등 아래에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움직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을 잃은 꼬마아이마냥 앞으로 무작정 걸어봤자 찾고자하는 것에서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알고 있음에도 마음처럼 쉽게 인정되질 않았다. 카가미는 한 손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쿠로코가 잃는 것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제 것에 흠집이라도 나면 금세 이를 드러내며 짖어대는 개들과는 다른 곳에서 사는 이였다. 얻는 만큼 내어주고 잃으며 원치 않던 자리를 유지해오던 쿠로코는 자신의 것에 그렇게 커다란 소유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언제든 내어줄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제든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그를 카가미는 곁에서 지켜봐왔다. 괜한 조바심으로 일을 망쳐버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쿠로코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뒤섞인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핫케이크를 먹거나 담배를 피거나하는 평소의 그의 모습이었다. 주인의 손가락을 물어버린 개에 대한 배신감어린 표정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카가미 군.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다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카가미는 자신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후회했다. 하나씩 하나씩 잘라내어버리면 모를 줄 알았다. 그렇게 손과 발을 모두 잃은 쿠로코의 곁에서 그것들을 대신하며 살아가자고, 개에서 연인으로 살아가자고. 그렇게 결심했었다. 그래서 결과는 무엇이지? 카가미는 숨을 삼켰다. 남은 것이라고는 쿠로코가 갖고 있던 것들뿐이었다. 가장 원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쿠로코는 떠났고, 쿠로코의 유품들이 이곳에 남겨졌다. 그중에는 카가미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패를 겪고 겪은 이들의 등에는 커다란 문신이 새겨지곤 했다. 자랑으로 여겨지는 문신을 온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이들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카가미는 이곳에 섰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쿠로코의 말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등에 문신을 박아 넣었다. 이를 드러내고 붉은 꽃 한 송이를 지키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 한참을 고민하던 쿠로코가 알겠다며 소개해준 문신사에게 받은 것이었다. 겨우 한 송이를 지키고자하는 문신을 보며 초라하다고 말한 이들도 있었으나 그는 진심이었다. 등짝을 가득 채운 호랑이의 옆에 작게 그려진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카가미는 이따금 거울로 바라보곤 했다. 더 이상 이 세계를 나가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쿠로코의 말에 너를 떠날 리가 없다며 그는 웃었다. 이로써 완전히 쿠로코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오래된 문신이 따끔거렸다. 바늘로 그 위를 다시 찔러 색을 내는 것만 같았다. 잊어버린 마음을 깨달으라는 듯 바늘이 피부 위로 거침없이 박혔다. 욕심을 부린 대가였다.

지내온 시간에 비해 깨끗했던 쿠로코의 몸을 카가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문신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크고 작은 상처가 전부였던 마른 몸이었다.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지워질 터였고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언제든 일반인 사이에 섞여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갈 수 있을 그를 떠올리자 두통이 몰려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버린 쿠로코를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이곳에서의 자신을 버려버린 쿠로코를 붙잡아오면 다시 예전처럼 그의 사랑스러운 개로 살 수 있을까. 많은 물음들이 울음과 함께 뒤섞였다.

보스에게 버려졌음을 깨달은 쿠로코를 빠르게 붙잡아 집에 가뒀다. 쿠로코의 지지기반을 모두 정리한 뒤에 맛있는 것이라도 해주면서 천천히 설득해나갈 생각이었다.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부하들을 붙여 쿠로코를 지키며 움직였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한다면 쿠로코도 납득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랫동안 제 옆을 지켜온 부하에 대한 정을 지키기보다는 더 뛰어난 개에게 자리를 주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계산을 마친 보스를 등에 업고 행하는 일은 쿠로코도 이해해주리라고 카가미는 믿었다. 쿠로코와 이곳을 묶고 있던 연결고리들을 끊어버리면 결국 하나 남은 곳에 의지하며 살 것이라고, 그렇게 평생을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후회로 남았다.

쿠로코는 부하를 죽이고 차를 몰고 떠났다. 그 뒤를 쫓아보려 했지만 몇 안남은 쿠로코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가로막혀 쫓지 못했다. 겨우 정리를 끝냈을 때는 쿠로코의 흔적은 모두 지워진 뒤였다. 쿠로코가 들고 간 것은 여러 차들 중에서 제일 허름했던 자동차 한 대와 조금씩 불려나가던 뒷돈이 전부였다. 그 밖에 업소나 재산들은 모두 남겨진 채였고 그 명의는 곧 보스의 변호사를 통해서 카가미의 이름으로 바뀔 터였다. 이런 게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세상에는 의미 없는 숫자들만 남아버렸다. 모든 것을 알려주며 가장 좋은 것을 주었던 주인을 감히 제 것으로 하려했던 벌인 것만 같았다. 개는 개로 남았어야했다.

쿠로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 카가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쿠로코의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만 계속될 뿐 쿠로코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쿠로코가 어디로 갔는지조차도 짐작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유의 몸이 되어버린 그를 찾을 방도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망가져버린다면 다시 뒤를 돌아봐줄까. 카가미는 문뜩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정말로 나를 사랑했다면 그리 해주지 않을까하는 오만한 자신감이 일었지만 그것도 금세 비에 쓸려 떠내려 가버렸다. 남은 것은 웅덩이에 비친 가로등의 초라한 빛 한 줄기가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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